박제된 기억, 돌아오지 않는 계절에 대한 그리움
김시종의 『잃어버린 계절』을 읽고


계절의 시작은 언제일까? 우리는 보통 생명이 여무는 ‘봄’을 계절의 시작으로 이해하며 살아간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잃어버린 첫 계절은, 계절의 시작은 여름이다. 그의 계절은 왜 여름에서 시작할까? 시집을 읽고 난 지금 그가 잃어버린 계절, 그 박제된 기억에 대한 그리움을 읽게 되어 시인의 일대기가 궁금해졌다.

제주도가 고향인 시인은 일제강점기를 16세까지 살아왔고 조선어 수업이 사라진 ‘황국식민화’된 교육 속에서 ‘황국 소년’으로 성장해 한국어보다는 일본어가 더 일상적이고 익숙해졌다. 일본 천황이 ‘현인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가 맞이한 광복은 ‘낯설음’ 그 자체였다. 마을 전체가 ‘만세’소리로 들끓어도 일본이 패망한 현실의 탄식으로 일본 군가나 창가를 부르며 풀이 죽어 있던 시인에게 문득 떠오른 노래가 조선어로 부른 미국민요 ‘클레멘타인’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낚시하며 부르던 노래였던 ‘클레멘타인’으로 조선인으로 자각하게 된 시인은 4.3사건에 휘말리며 생존을 위해 1949년 일본으로 밀항한다. 일본 오사카 재일조선인 집거지인 이카이노(猪飼野)에 정착하게 되면서 ‘진달래’라는 동인지 활동을 통해 문학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밀항 전 남로당 활동의 연장선이자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에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박헌영에 대한 숙청과 김일성 신격화가 본격화되면서 조총련 활동에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결국 1970년 이후 조총련과 결별하고도 아직 민주화되지 못한 독재정권의 이남에 대해서도 동질감을 가지기 어려워 오랜 시간을 더 ‘(식민지)조선적’ 국적의 재일조선인이자 조선어 교사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 살아가게 된다.

사실 이 시집 이전에 김시종 시인을 알지 못했다. 가끔 일본에서 활동하는 제주도가 고향인 어느 문인의 기사를 접했던 기억은 남아있지만, 그것과 지금의 시집을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정도의 관심은 가지지 못했었다. 우리가 재일동포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알고 있는 ‘자이니치’라는 표현은 재일(在日)의 일본어 표기로 그들은 일본에 머물며 동화되거나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다.

시인은 한동안 조선학교 국어(조선어)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시인 스스로 밝혔듯이 조선학교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일본 우익의 많은 핍박이 있었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도 영화 <우리학교> 속에서 보여 준 조선학교의 모습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모습과는 다른 일본의 겁박으로 정규교육과정으로 인가받지도 못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정체성을 이어가기 위한 절박함과 자부심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발표한 모든 시는 일본어로 쓰여 있다고 한다.

내가 느끼는 이질감과 다르게 일본 안에서 틈새 인으로 살아왔지만, 자신의 말과 시에 대한 서정을 일본어로 배우고 조선인으로 자각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일본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글로 선택한 것이 일본어인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름으로 시작하는 계절

시인의 계절은 여름으로 시작한다. “여름은 계절의 시작이다. / 어떤 색도 바래지고 마는 / 터질 듯이 하얀 헐레이션(halation)의 계절. <여름>”, 여름은 “기다리다 말라버린 / 가뭄의 계절 <여름>”, 여름은 “온통 투명해진 시절이기에 <기다릴 것도 없는 8월이라며>”, “여름 바람처럼 여름이 사라져간다. (잃어버린 계절)”라고 말하고 있다. 과다노출로 뿌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절인 여름은 세상 모든 게 말라버리고 사라진 계절이다.

여름은 “축축하고 소금기 없이 늘어진 시간 / 전선(電線)까지 녹이 파고 들어가 <시퍼런 테러리스트>”, “흠뻑 젖은 목소리 <빗속에서>”만 보이는 음습함에 갇혀있는 시간이다.

그 계절에 “방치된 무덤과 / 희미해진 가향(家鄕) / 함께 등 돌린 세월은 / 그것대로 아득해도 좋은 것 <하늘>”이 되었고 “모두들 떠난 마을 / 이제 정적이 어둠보다 깊 <마을>”은 텅 빈 마을이 되었다.

마을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길들여지면서 “가서 만나면 꼭 세상을 뒤집을 나의 울분이 / 어떤 반응 하나도 없이 / 버려진 전단지처럼 무시당하고 만다. <시퍼런 테러리스트>” 벗어날 곳이 없는 곳에 떨어진 “벗어나면 황야 <어금니>”라는 두려움에 떨며 “균형의 질서 깊숙이 / 천천히 겁먹기 시작한 나의 사상. <어금니>”처럼 새로운 질서 속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계절에 다시 “송곳니는 뾰족해진다. / 균형에서 빠져나온 것은 모두 / 으르렁 소리를 감춘 / 어금니가 된 <어금니>” 날을 세우며 시작한 여름이 되었다.

<잃어버린 계절>에서 표현되듯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라짐에 대해 익숙해져야 하는 계절이 여름이었다. 앞선 시간과의 단절이 부른 시인의 여름은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시작이 되었다.

이방인의 가을

가을은 겨울로 가는 길목이다. 겨울을 위해 쌓아두어야 할 것들을 위한 시간이지만 이미 모든 것이 사라진 빈 곳에서 시작한 이방인의 가을은 이질적이고도 공허한 시공간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도 벅찬 시간이 된다.

“조상의 땅과 제주도가 / 재일(在日)과 섞여들어 말갛<여행>”게 되는 순간에도 토벌군을 피해 숨어있던 기억이 꿈처럼 스며들어 섞여들기 힘든 여행자로 만들어 버린다.

“주의(主義)를 앞세우고 주의에 빠져 / 이래저래 퍼마시고시절에 분노하고 <여름 그후>” 보내지만 “헛된 외침이 / 열리지 않는 나무문 / 녹슨 지도리 한쪽에서 / 멈춘 시간을 견디 <녹스는 풍경>”게 할 뿐이다.

그래도 계절은 열매 맺는 가을이라 “대지의 숨결은 금빛 알갱이 속에 들어가 / 빵이 되고 국수가 되어 <두개의 옥수수>” 나를 먹여 살리고 “감이 하나 빨갛게 선명 <희미한 전언>”하게 익어가는 계절이지만 현실은 “고향도 연고도 잃은 새가 / 쓰레기밖에 주울 게 없는 일본에서 / 나의 말을 모이로 살아가고 있다. <조어(鳥語)의 가을>”라며 고향을 떠나 제대로 된 직장도 구하기 힘든 척박한 환경에서 조선어 선생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게 된다.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비상(飛翔)은 오로지 재일(在日)의 한가운데에서 시들고 있다. <전설이문(傳說異聞)>”고 자조적인 탄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결국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한 상태로 “변하지 못하는 저를 / 사랑해주세요. <창공의 중심에서>”라고 호소한다.

그렇게 결실을 위한 힘겨운 계절을 보내야 했다.

싹을 키우는 겨울

힘겨운 결실을 지나 찾아온 겨울은 오히려 희망한 기대로 부풀어져 있다. 가을 끝에서 머물러 버린 나뭇잎 한 장은 “사라져버린 참새떼를 소생시킬지도 <나뭇잎 한장>”모를 희망이 되고 아직 피지도 않은 꽃에 대해 “막연히 봄의 이른 꽃들을 / 턱을 괴고 생각 <이토록 멀어져버리고>”하는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혼란스러웠던 지난 계절이 결실로 엮어져 새로운 싹을 틔워낼 수 있는 씨앗으로 기대를 품게 되는 시간이다. “차라리 쓰러져 이 땅에 묻혀야 한다고 / 한발 한발 기다릴 것도 없는 봄을 안달하면서 / 가는 거다. 싹을 튀우기보다 / 씨앗이 되어 바람을 타는 거다 <뛰다>”라고 지친 나를 다독이며 북돋는 시간이다.

하지만 단절된 공간인 이방인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매울 수 없는 구멍이 존재한다. 끌려가는 노파의 숨 끊어질 듯한 외침인 ”호또께에- 호또께에- <구멍>“는 ‘내버려 두라’라는 것인지 ‘부처님’이라는 외침인지 아니면 이상한 억양으로 들린 ‘어떻게~, 어떻게~’라는 한국어의 안타까운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리운 얼굴이 흩어지고, 쌓<사람은 흩어지고, 쌓인다>“이는 순간에도 ”그래도 싹을 살짝 내민 / 상자 속 수국 <수국의 싹>“이 되고 ”파란 대나무가 휘청 / 여우눈에 몸을 <겨울의 보금자리>“ 떠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해(年)는 기울어 그림자는 길어지고<그림자는 자라고>“ 다시 신년이 찾아와 봄을 기다리게 한다.

말과 문화가 다른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또 다른 고향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비바람과 삭풍에도 견뎌낼 새로운 보금자리가 만들어지면 결국 버텨내게 된다. 보금자리에서 품은 새로운 씨앗은 곧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로 겨울을 나는 것이다.

오지 않는 봄에 대한 갈망

새롭게 만든 보금자리 그곳은 또 다른 고향이다 ”고향이 / 돌아갈 나라에 있기 위해서는 / 멀리 뼈를 묻을 고향을 다시 한번 가져야 한다. <귀향>“는 말처럼 여름에서 시작한 계절은 뼈를 묻을 고향이 되어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옛고향을 그리는 새로운 봄날을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사막 한가운데 목련을 기다리듯 ”이라크에는 목련이 피지 않으리라. <목련>“며 봄의 헛됨을 이야기한다.

분명 해가 가고 해가 오지만, 해가 넘어갈 때마다 ”해는 가는가 / 해는 오는가 <이 무명(無明)의 시각을>“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해넘이를 반복하게 된다.

그것은 과거와 이어진 나라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가로쓰기 문자만이 나날이 득세하는 / 디딤돌이 9조와 만난다. / 아무래도 정착하기 어려운 나라의 말이 / 일본어의 보도(步道)에서 ‘한류’와 만난다. <이어지다>“ 것처럼 끊임없이 긴장과 반가움을 교차해 간다. 평화를 갈망하며 지워지지 않는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은 봄이다.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고 ”영원히 다른 이름이 딘 너와 / 산자락 끝에서 좌우로 갈려 바람에 날려간 뒤 / 4월은 새벽의 봉화가 되어 솟아올랐 <4월이여, 먼 날이여>“던 그 날의 기억에 갇혀있을 뿐이다.

분명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었지만 ”소생하는 계절에 / 올 것이 오지 않는다. / 필 것이 피지 않는다. / 날아드는 것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 올 것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필 것이 피지 않았기 때문에 봄은 오지 않았다. 돌아갈 일 없는 아들을 기다리다 늙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쓸쓸히 봄바람을 기다린다.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순환되지 않는 계절

시인은 “그렇게 1년이 60년이나 되었던 거라고. <여름 그후>” 말한다. 계절이 시작된 여름 그 후, 일 년의 시간은 그대로 육십 년이 되었고 계절은 사라져 봄을 기다리던 겨울에서 멈춰버렸다.

시에서 말하는 60년은 종전(우리는 광복) 60년을 말하는 것으로 시기적으로 2005년에 해당한다. 이 시집이 일본에서 2009년에 발표되었고 아마도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2005년 전후에 쓰였다고 여겨진다. 그 시기 일본의 총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로 2001년부터 총리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다녀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던 시절이었다.

식민지 시절을 겪었으면서도 일본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재일(在日)에겐 더더욱 고통스러운 순간들이었을 것 같다.

이 시집 속에는 그러한 재일동포의 입장은 물론 사회주의자로서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애증과 자신이 사상적 고향으로 여겼던 북쪽 정권에 대해 격양과 안타까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도 “납치 생존자 다섯명이 트램을 내려 <이토록 멀어져버리고>”오는 겨울을 맞이한 겨울의 첫 대목은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하는 바람이 느껴진다.

시집 말미에서 군국주의 시절부터 그대로 이어져 오는 가로쓰기 문자의 나라에서 일본어로 재일(在日)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본어로 익힌 감성으로 일본을 비판하는 날카로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어 작성된 시였던 만큼 일본 시가 특유의 음률이 어떠했을지 궁금함이 남아있긴 하지만 일본어로 된 시를 읽어보지 못해도 느껴지는 감성은 그대로 잘 전달한 것 같다.

여름에서 시작한 시인의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인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마을의 내력은 이제 일본에서 끊어져버린 것인가. <조어(鳥語)의 가을>”를 걱정하던 시인에게 준비된 싹을 틔우지 못하여, 비워진 여름을 풍성하게 채워줄 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시인이 잃어버린 계절은 이제 이 시집으로 박제되어 기억될 것이다.

계절은 끝나지 않았지만, 시인은 돌아왔다.
(남로당 전력으로 인해 오지 못하던 고향은 민주화와 함께 해금되어 방문하게 되었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됨을 꽃잎이 춤추는 새로운 운명의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알리며 시집을 끝맺음한다.

이제 우리의 계절로 다시 잃어버린 계절을 채워가게 될 것이다.

 

Posted by 신천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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