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주창하고 엥겔스가 지지했던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있었다.

아마도 시대적 선망이었고 과학이라는 이름이 주는 강렬함과 객관적일 것 같은 용어에 매료되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종말을 고했는지 논증하는 것은 사회학자와 철학자의 몫으로 넘기고 싶지만 그러면 이 또한 불성실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에 미약하나마 아는 선에서 비판하자면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말 그대로 과학적 비평이었다.

과학적 논증이란 것 자체가 가지는 가설과 검증이라는 절차적 한계성을 떠나서도 과학적 논증은 과학적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때문이기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에 기초한 논증조차도 대중에게 어필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과학적 진실과 과학적 검증 위에 설립된 사회학적 가치였다. 지난한 논증을 위한 기초 지식이 제대로 전달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으며 그것은 집단 학습체계와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인민을 길러내어 자신들이 가져야할 과학적 논증의 과정과 그 결론에 대한 설득을 수월하게 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사회주의가 가진 사회학적 가치가 과학적 객관성을 가진 대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어려웠다.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이 객관화 될 수 없었고 과학은 정파적 프레임에 갇혀 권위와 권력에 복무하는 도구가 되었다.

결국 과학적 사회주의는 도덕, 윤리, 감성, 감정 보다는 과학적 탐구정신과 진실에 대한 합리적 접근에 기반한 필연성을 추구하고 과학의 발전에 함께하기에 진보라는 이름을 사회적 시스템에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진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현대의 뇌과학이 입증한 문제와도 연관되는데 실제로 인간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사건을 이해하기 보다는 감성과 감정의 영역으로 사건을 이해한다는 점이 뇌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조차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객관화한다고 보는 정파적 관점에선 단지 불확실한 학문적 한계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번 서울 시장선거에서 민주당의 필패를 예측하고 어느 일각에서 벌어지는 '토착왜구'라는 단어에 대한 조롱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민주당이 이해할 수 없다면 민주당은 다음 대선 이후에 그 이름조차 남기기 힘든 당이 될 것이다.

어쩌면 나 조차도 386세대의 끝자락에 걸쳐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386세대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상징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첫번째는 조국이라고 생각한다.

조국을 비판하는 어느 혹자는 사법고시조차 패스하지 못한 조국을 법무장관으로 발탁한 것이 문제라고 하기도 하고 어느 혹자는 조국이 가지는 강남좌파의 한계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어느 혹자는 그 모든것을 아우르는 조국의 건강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심상정의 이우학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 교육에 올인하고 그것에 투여된 자본이 남다른 가치를 가진다고 하는 것에 대하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이 가졌던 지향했던 가치와 일치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었는 지는 궁금하다.

 

솔직히 조국사태라고 불리는 상황을 접하면서 조국을 지지했던 사람들 조차 조국이 아무런 부정을 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조국사태에 1심결과에 대한 중계를 하며 어느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친구들 끼리 컨닝한 것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그것으로 실형을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탄조로 하소연하듯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며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조국의 지지자였을 그분에겐 조국과 그의 배우자 벌인 일이 그저 친구들끼리 가볍게 컨닝한 정도의 일이라고 여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컨닝은 아무런 잘못이 아니었을까? 토익시험에 대학학사 졸업시험에 기타 여러가지 시험에 커닝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과연 업무방해죄에 해당하지 않을 아이들의 치기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을지 자신의 자녀가 관련된 시험이었다면 그렇게 관대할 수 있었을 지 궁금해졌다.

대학시절 선배 한분은 뒤늦게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는 나에게 너의 자녀가 정말 학원하나 다니지 않으며 남들에게 뒤쳐진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런 경쟁이 당연하다는 것을 나에게 주지시켜준 적도 있었다.

 

내 의지이기도 하지만 궁금하다. 그 분은 자신의 자녀에게 그런 경쟁이 합당한 것인지 감당할 수 있는 지 물어봤을지 정말 궁금하다. 나 또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아이와 토론하고 대화하며 물어본다. 너가 정말 경쟁 속에 들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런 경쟁이 너가 즐기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부모의 역활이 무엇인지 정답을 쉽게 도출하긴 어렵겠지만 최소한 정인이의 양부모처럼 학대만을 하지 않는 것이 부모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개입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믿지만 과연 우리는 자녀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좋은 학교와 학벌이 행복의 기준이라면 어느 정도의 학벌이어야 만족스러운 것일지 그리고 좋은 학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과연 버리거나 불행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 인간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기에 학벌과 학력에게 힘을 쏟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난 우리시대의 기준에서 봤을때 그다지 공부를 잘한 것도 뛰어난 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나의 자녀과 남들보다 뛰어날 것이라는 가정을 하지 못한다. 왜냐 나와 내 배우자가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자녀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에 대해 참 많은 말들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이다. 선거 직후 어느 대화에서 오XX가 시장이 된것에 대해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대뜸 오XX가 선출된것이 민주주의가 잘 발현된 것이고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말을 하였고 상대방은 불편하지만 그다지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XX가 당선된것은 민주주의일까? 아닐까? 우리는 6.8세대를 거치지도 못했고 근대적 민주화 과정을 접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뒤늦게 깨닫는 것일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란 사실 그다지 객관적인 제도도 아니고 어쩌면 다수의 횡포에 가까운 폭력적인 제도일 수도 있다.

다수의 시민에게 지지를 받으면 시민이 위대한 것이고 버림받으면 무지한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라는 것의 가치가 과연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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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신천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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