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의위협
#판데믹

콜레라연대기

1832년 파리에선 콜레라 무도회가 열렸다.

2010년 미국 키웨스트에선 '뎅기 나이트 피버'라는 집단은 모기 복장을 입고 거리를 휘젖는 축제를 벌였다.

2020년 대한민국에선 클럽에 젊은이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이 사건들은 우리가 가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인식이 200년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인도의 뱅골에서 출발한 콜레라균의 여정을 따라가며 바이러스나 균과 감염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고 있다.

중세의 흑사병이 가져다 준 공포와 마녀사냥으로 대변되는 사회혼란이 있었지만 말 그대로 중세스러움으로 치부받고 넘어가게 되지만 19세기 인도에서 시작되어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퍼져나간 콜레라에 대해 소위 문명국이라는 나라들의 대응은 최근 어느 교회의 소금물 소독 사건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콜레라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도움을 주기 위해 아이티에 도착한 네팔의 유엔평화유지군을 따라온 콜레라균으로 인해 최근 아이티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책은 한편의 장대한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고도 정밀한 묘사로 콜레라의 전파 경로와 그에 대응하는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수인성 전염병이라는 것에 대한 많은 통계를 무시하고 소금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것을 발견했음에도 확인되지 않은 수은치료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분뇨를 인간의 몸에서 배출되었기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여기며 깨끗한 상수도를 거부했던 사건들을 보면서 과연 인간의 지성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저자가 많은 감염병 중에서 콜레라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근세를 관통하는 판데믹의 시초였고 히포크라테스로 부터 시작했던 인간을 신성시하던 서양의 고대의학에 대한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인도 맹갈로브 숲이 가득한 어느 해변의 비브리오 균이 전세계를 위협하는 50%이상의 치명률을 가지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의학적 진실과 과학적 진실을 외면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아집은 더 많은 공포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는 에볼라나 라임바이러스와 사스와 같은 다양한 감염병을 발생하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콜레라라는 확실하고도 명확한 대상을 통해 선명하게 인간들과 독성 유발자들(바이러스와 균)이 벌이는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바이러스나 균은 단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일 뿐이고 인간은 그 행위에서 발생하는 독성들에 적응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를 단일 생활권으로 이어주는 교통의 발달과 대량 사육으로 인한 종간 전염이 쉬워진 환경 무엇하나도 현재의 인간들이 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을 더욱더 바이러스나 균과 자주 접촉하게 만드는 환경은 고작 200년도 안된 환경이고 그 환경에서 판데믹은 앞으로 더 자주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우리는 균이나 바이러스과 싸운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과연 그들을 멸종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인지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무엇보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은 이런 감염병에 대한 기억을 유전적인 정보로 기록해 남겨두며 적응해 왔지만 현재의 환경은 이런 진화적인 선택을 하기에 너무 다양한 병원체에 쉽게 노출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승리할 수 없는 전쟁에 뛰어는 인류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지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겠지만 이번 판데믹이 새로운 긴 여정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소니아 샤라는 작가를 처음 만났지만 깊이있는 관찰과 꼼꼼한 서술을 매끄럽고 이해하게 쉽게 이어가는 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책이다. 심지어 과학도서를 거의 읽지 않는 아내가 먼저읽고 재미있다고 추천한 책이라 깜짝놀라 서둘러 읽었던 책이었는데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Posted by 신천지행
,

#폴리아모리
#독서후기
#사랑이란
#결혼이란

 

이 깃발은 폴리아모리를 상징하는 깃발로 파랑은 개방성과 정직성을 빨강은 사랑과 열정을 검정은 숨겨지도록 강요되는 사회적 압력을 상징하고 깃발의 정 가운데 파이(π)는 폴리아모리의 첫 글자인 P를 의미한다.
기호는 하트에 뫼비우스의 띠를 결합시켜 무한대의 사랑을 의미한다.

 

 

 

< 폴리아모리> - 후카미 기쿠에 &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 - 심기용, 정윤아

-----
이 두 책은 폴리아모리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이다.

앞의 책으로 사회학도의 석사과정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사실들을 다시 재구성 한 것으로 본인은 폴리아모리스트가 아니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운동전반을 다루고 있어 폴리아모리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좀더 수월한 측면이 있었다면 국내 저자들이 쓴 두번째 책은 자신들이 왜 폴리아모리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직접적인 당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각자 책이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두번째 책은 저자가 철학과라서 그런지 내용이 다소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내려는 경향이 있어 어떤면에선 폴리아모리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하는 역효과를 불러 올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폴리아모리는 관념이자 현실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좀더 가치전달이 잘되어있는 책이라 지금 서술하는 내용은 대부분 후카미의 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폴리아모리란 그리스어에서 따온 폴리(Poly)와 라틴어의 아모리(Amory)의 합성어로 폴리는 여럿을 의미하는 접두어이고 아모리는 사랑을 의미하는 명사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여러개의 사랑 정도가 될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선 '비독점 다자간 연애' 또는 '비독점 사랑'정도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폴리아모리라는 말은 1994년 설립된 '논-모노가미' 비영리단체인 '러빙모어(loving more)'에서 1995년 자신들의 사랑을 '폴리아모리'라고 명명하자고 회의에서 결정한 것에서 시작한다.

모노가미가 일반화되면 19세기 자유성애운동부터 1960년대 히피문화를 거쳐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논-모노가미(Non-monogarmy)' 운동은 꾸준히 이어져 왔었다. 이런 '논-모노가미'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러빙모어'라는 단체가 주창해 폴리아모리라는 하나의 단어로 기존의 다양한 사랑에 대한 결합을 총합하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

'모노가미(monogarmy)'는 1:1의 결합으로 인한 혼인관계를 말한다. 소위 '일부일처제'에 기반하는 관념이다. 모노가미가 주류가 된 것은 근세 이후로 생각보다 역사가 길지 않으며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듯 사랑없는 결혼이나 행복없는 결혼생활을 윤리라는 이름으로 부여잡고 살아가는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었다.

특히,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 가정과 가족에서 여성이 종속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노가미는 소유와 재생산적인 가치에 좀더 치중되어있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모노가미의 특성에 대한 반발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해 오랜동안 여러가지 형태의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오늘날에 와서 폴리아모리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고 있는 추세로 보여진다.

후카미의 책에선 다양한 통계가 인용되고 있는데 현재 미국의 폴리아모리를 이끌고 있는 그룹은 중상층 고학력 백인들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인 것 같다. 물론 그들만이 그런 사상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정립되어 가고 있다고 볼수 있을 것 같다.

여러 통계중에서 인상적이 었던 통계가 종교에 대한 통계였는데 대상이 미국이다보니 기독교가 많았다고 생각되며 불교도 9%를 차지하고 있었다. 페이건, 무교, 기독교가 각 30%정도씩을 차지하고 있다. 의외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몰몬교에 대해선 폴리아모리스트들 내부에서도 거부감이나 논쟁적인 사안이라고 한다.

페이건은 다신교적 신앙과 자연숭배를 가진 비기독교적인 종교로 1962년 설립된 '전세계교회'가 대표적인 종교단체이다. 페이건 중에는 위칸(Wiccan)이라는 부류가 있는데 이들은 여신을 숭배하는 그룹으로 '누구도 해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대로 해라'가 기본 윤리라고 한다.

그리고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을 언제 어떻게 접하고 자신의 삶으로 받아드렸는지에 대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20대부터 사르트르와 보봐르의 관계에 많은 자극을 받았던 나로서는 실존주의적인 접근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는데 실제 미국의 폴리아모리스트들 중에선 SF소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답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스타쉽트루퍼스>의 작가인 하인라인의 <낯선 땅 이방인>은 종교과 폴리아모리적 관계를 다룬 작품으로 이책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종교단체가 '전세계교회'라는 페이건 단체라고 한다.

폴리아모리에서 중요한 개념은 비독점(Non-mono), 컴퍼션(Compersion), 메타모어(Metamore)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비독점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교류하는 대상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를 위해 컴퍼션이라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컴퍼션은 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서 연애적이거나 성애적인 관계를 통해 행복을 느낄 때 자신 또한 행복을 느끼는 감정을 지칭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내 연인이 사랑하는 존재를 메타모어라고 부른다.
폴리아모리의 가장 큰 난적은 질투다. 질투가 없는 사람들도 일부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질투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는 것에 많은 에너지가 사용되는 것같다.

어느 폴리아모리 그룹에서 구분한 질투에 대한 유형이다.

1. 독점욕으로 인한 질투
2. 소외감으로 인한 질투
3. 라이벌 의식으로 인한 질투
4. 에고로 인한 질투
5. 불안으로 인한 질투

각 유형별로 어떻게 대응하고 마음가짐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매뉴얼북처럼 안내하고 있는데 후카미가 인터뷰한 인터뷰에 대한 투표에선 '불안', '라이벌 의식', '소외감', '에고', '독점욕' 순으로 질투를 느낀다고 답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사랑이 생긴다는 것은 커다란 감정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니 만큼 '불안'감이 크게 다가올 것 같다. 그것을 받아드린다고 해도 비교되거나 시간적인 소외감도 생기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만들이 나타날 수 있으니 어쩌면 내가 누리는 사랑의 감정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많은 폴리아모리스트들이 컴퍼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면 폴리아모리로서의 애정도 사그라들게 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폴리아모리들에게 '질투'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극복해야할 과제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질투가 무조건 나쁘거나 억지로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기 보다는 질투가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 이해하고 그것을 해소하여 긍정적으로 발전하려고 하는 노력을 행하는 것으로 폴리아모리를 유지할 수 있기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기쁘게 받아드리는 것을 '컴퍼션'이라고 칭하며 관계변화의 중요한 과정으로 다루고 있다.

두 책 모두 BDSM, 동성애, 페미니즘을 언급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는 것이 폴리아모리의 기본 사상이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양성애자로서 이성애와 동성애적 존재에 대한 열망을 포괄할 수 있는 폴리아모리야 말로 아주 적절한 대안일 것 같다.

물론 이성애자들에게 폴리아모리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한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점점 확대되어지는 현대에서 폴리아모리 운동은 새로운 대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요즘 불륜과 사랑에 대한 배신을 주제로 하는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많은 것 같다. 해당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외도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이후 동요되는 감정과 모노가미 룰을 깬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극의 전개가 시작되는 것 같다. 만일 극 속의 배우자가 다른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상대의 동의를 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20년 정도의 결혼생활을 유지해야 했던 멀지 않던 과거와 달리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결혼생활 유지기간이 길어진 현대사회에서 결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사랑이 하나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무척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Posted by 신천지행
,

<<오늘부터, 詩作(시작)>>>

시를 짓다.

이 책은 작가가 글쓰기를 시작하는 청소년을 염두에 두고 BBC에서 제작했던 티비 프로그램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된 책이다.

말 그대로 글쓰기에 대한 안내서로 제목은 시작이지만 시를 쓰는 것 만이 아닌 글쓰기위해 영감을 얻는 법을 작가로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역자의 말 중에서 시는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기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을 느낀다.

역자의 말은 공감이 갔지만 역자의 번역에는 공감이 가질 않았다.

총 아홉날로 구분지어 동물, 날씨, 사람에 대한 표현, 생각하는 법, 풍경에 대한 글쓰기, 소설쓰기, 가족 만나기, 달에 사는 생물이라는 주제로 주제마다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소개하며 작가의 시나 다른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소설쓰기 이후는 산문이 많고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이 대부분이라 거부감이 덜 했지만 솔찍히 영시를 한국어로 번역한 중간의 시들은 정서적인 괴리감이 느껴졌다.

의도가 좋았고 전반적으로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예제로 걸어둔 작품들이 오히려 눈에 거슬려 분량이 작은 책임에도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글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설명은 차분하고 이해하기 쉽게 말하고 있으며 감성적인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괜시리 시 한편 끄적여 보고싶다.

 

Posted by 신천지행
,